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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acy Stories/라디오 스타

볼셰비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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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발생한 프롤레타리아혁명.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1905년의 제1차 러시아혁명과 1917년의 2월혁명을 포함하는 러시아의 사회변혁 혁명을 일컫는다. 1905∼1907년의 혁명을 소련에서는 제1차 러시아혁명이라 하였고, 1917년 3월(러시아 구력 2월)과 11월(동 10월)의 혁명을 유럽 ·미국에서는 각각 ‘3월혁명’ ‘11월혁명’이라고도 하지만, 소련에서는 전자를 ‘2월혁명’ 또는 ‘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후자를 ‘대(大)10월 사회주의혁명’이라고 하였다.

<<배경>>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에는 혁명적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이었던 크림전쟁(1853∼56)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군사적 후진성이 드러났으며, 1861년에는 농노해방을 단행하였다. 농노해방은 러시아의 근대화를 의미했으며, 동시에 자본주의 발전을 자극했고, 그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수도 급격히 늘어나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혹심한 경제공황으로 농민이 신분상으로는 농노 상태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나, 경제적으로는 발전의 모체였던 중산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장노동자의 상태도 선진국에 비해 위생시설이 형편없었고, 낡은 기계로 인한 생산량 감소로 임금이 낮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합법적 활동으로 그것을 개선할 길이 막혀 있었으므로 노동운동은 과격화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또 제정러시아는 잇따른 침략으로 인근 제지역을 병합한 ‘제민족의 감옥’에 불과했으므로, 소수민족의 소요가 광범하게 확대되어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 격화했으며, 혹심한 경제공황과 경찰의 탄압은 농민봉기를 더욱 자극하였다. 그리고 주요 도시에서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선동으로 체제에서 소외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세력의 정부공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제1차 혁명
러시아에서는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심한 공황, 실업자의 증가, 임금의 저하, 지가 폭등 등으로 고조된 노동자의 반정부운동과 자유주의자의 입헌운동이 러 ·일전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폭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14만 명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가풍 신부의 인솔 아래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발포하여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하였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제1혁명이 시작되었다.

사건 후 수도의 노동자는 총파업에 들어갔고, 그것은 전국에 파급되었다. 5월에는 각지에서 군대와의 무력충돌이 있었고, 6월 말에는 포↗킨호(號)의 반란이 일어나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0월에는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의 동맹 파업은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발전하여 혁명은 고조에 달하였다.

드디어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 및 선거에 의한 전국적 제헌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10월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은 투쟁을 계속하여 12월 하순에는 모스크바 노동자가 10일간이나 무장봉기를 하는 등의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그런 한편 10월선언은 입헌정부를 요구해 온 중산층과 일부 혁명세력을 만족시켰고, 10월선언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혁명세력이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와 도시의 대규모 혁명은 끝나고 말았다. 이로써 1906년 5월에는 최초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의회인 두마(Duma)가 구성되어 러시아 제1차 혁명은 실질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월혁명>>

1914년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러시아의 군장비와 경제력의 한계가 드러나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대전 중 차르의 계속된 동원령, 가축의 징발로 농업은 황폐화되고, 군수공업의 강화로 인한 생필품의 감산, 도시의 식량 ·연료사정 악화는 대도시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5년 여름 카데트(입헌민주당)를 중심으로 ‘진보블럭’이 결성되어 정부의 실정, 전쟁 수행상의 실책에 대해 엄한 비판이 가해졌다. 16년에는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치안당국마저 혁명의 절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라스푸틴에 심취한 황비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는 여전히 전제(專制)를 고집하고 개혁을 생각하지 않았다.

17년에 접어들면서 1,33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2월 중순부터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인하여 수도지구 사령관 카발로프 장군은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3월 8일(러시아 구력 2월 23일) 영하 20 ℃ 의 추위에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시민들에게 식량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 떨어지자 시민들은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드디어 니콜라이 2세는 카발로프 장군에게 진압할 것을 명령했으나 거부당했으며, 제3일부터는 군부마저 반란을 일으켜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제4일째는 반란병과 노동자가 감옥에서 정치범을 석방하고 관청을 점거하였다.

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이날 두마(국회) 지도자들은 12명으로 임시위원회를 구성, 군주제를 살리는 길은 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신내각을 구성하는 길이라 판단하고 군부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결정하였다. 니콜라이 2세도 이를 받아들여, 3월 15일 동생인 미카엘 대공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그러나 양위를 받은 미카엘 대공은 앞으로 구성될 제헌의회에 의해 추대되지 않는 한 제위를 계승할 뜻이 없다고 밝혀, 결국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3월 15일 구성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소위 2월혁명인데, 1905년의 제1혁명과는 달리 농민을 대표하는 군부가 노동자의 혁명에 참가하여 대중봉기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0월혁명>>

2월혁명 후 정치권력을 잡은 러시아의 임시 정부는 전쟁계속정책을 취하였다. 따라서 평화와 생활의 안정을 구하는 대중의 불만이 높아졌다. 4월 중순 망명중인 스위스로부터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등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6월 18일 임시정부가 행한 독일공격의 실패로 반정부열기가 높아지자, 7월 3일 볼셰비키는 수도의 군대와 노동자들의 무장시위운동을 조직하였다. 정부는 7월 5일 전선으로부터 군대를 소환하여 이를 진압하고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어 급진적인 노동자 ·병사 ·볼셰비키에 탄압을 가하게 되자 이들과 정부 간의 대립은 첨예화하였다.

레닌은 탄압을 피하여 한때 핀란드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강력한 요청 아래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되었다. 11월 6일(러시아 구력 10월 24일) 봉기가 시작되었고, 혁명군은 거의 무혈로 수도의 중요 거점들을 점령, 제2회 전(全)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열린 7일 심야(深夜)까지는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소비에트대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일부가 퇴장한 가운데 봉기를 승인하고 권력장악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동궁이 함락되고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체포된 뒤에 대회는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채택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정부로서 선임하였다. 한편 동궁을 탈출한 케렌스키는 전선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탈환을 꾀하였으나 정세는 점점 기울어져 18년 1월 23일부터 개최된 제3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노농소비에트대회와 농민소비에트대회의 합동을 결정하고, ‘근로피착취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정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으며, 18년 2월에는 혁명이 거의 전국에 확대되었다.

<<명분과실상>>

러시아혁명으로 빵과 토지와 평화를 구호로 내걸고 노동자 ·농민 등 다수자에 의한 지배를 표방하는 공산정권이 후진국 러시아를 무대로 출현하였다. 러시아혁명 중 특히 10월혁명에 대한 평가는 구구하여, 찬미에서 매도(罵倒)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이 혁명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든간에 다음의 사실만은 밝혀져야 한다.

① 10월혁명은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을 토대로 삼음으로써 처음부터 사회개조에서 성공할 수 없는 조건을 안고 출발하였다. 즉 19세기 이래 출현한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사상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개조의 방법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계획경제에서 구했으며, 이 제도만 실시하면 그것만으로 자본주의보다 한층 훌륭한 사회가 실현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1845∼46년에 쓴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 ‘만일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하면, 결핍이 일반화되고, 생존투쟁이 다시 시작되며, 모든 낡은 오물이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강력히 반론하였다. 그런데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만을 형식적으로 바꾸어 놓는 혁명을 레닌이 실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변화의 궁극적 원인을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보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옳다면,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태어난 10월혁명은 가난과 생존투쟁과 구악의 소생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안고 나아가게 마련이었다.

② 10월혁명은 농민에 대해 철저히 계획된 속임수를 씀으로써 혁명정권은 처음부터 다수자의 지배가 될 수 없는 조건을 안고 출발하였다. 혁명 당시 러시아의 총인구 가운데 농민은 75 %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혁명에서 철저히 대중노선(大衆路線)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불과 10 %의 노동자계급만으로는 혁명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하여 75 %의 농민을 혁명에 이용하기로 결심한 레닌은 마르크스에게는 전혀 없던 노농동맹을 ‘혁명 승리의 불가결의 조건’이라고 강조하면서 토지분배를 미끼로 농민을 혁명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유제 폐지를 주장하는 공산당이 토지의 사유를 뜻하는 토지분배를 약속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속임수였다. 이리하여 1929∼32년에 실시된 농업집단화의 과정에서 약 1000만 명의 농민이 희생되는 대비극은 혁명의 처음부터 운명지워져 있었다.

③ 10월혁명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말살하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를 확립하였다. 임시정부만 타도하면 지체 없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제도를 확립하겠다고 끈질기게 주장 ·약속해 온 레닌은 정권을 잡은 지 3일 만인 11월 10일 언론을 구속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어서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에 의하여 11월 25일로 예정되었던 선거를 실시한 결과, 총 투표자 3600만 명 가운데 공산당을 지지한 자는 겨우 900만 명뿐, 유권자의 절대 다수가 레닌의 혁명정권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18년 1월 18일에 소집된 제헌의회를 폭력으로 해산시키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에 대하여는 총탄으로 답하는 한편, 독재 즉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법률에 의해서도 절대로 구속되지 않고 직접 폭력에 입각하는 무제한의 권력’으로써 민주주의와 대치하였다.

이리하여 의회민주주의를 심어보려는 많은 사람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이 타도한 황제보다도 훨씬 무자비한 공산당의 독재가 수립되었으며, ‘제헌국회의 죽음은 수난(受難)의 국가와 인민대중에게 새로운 고난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한 M.고리키의 예언은 불행하게도 적중하게 되었다. 철저히 계획된 속임수에 의하여,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세워진 무제한의 폭력지배가 장차 나아갈 길은 처음부터 하나의 숙명으로서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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